서론: 왜 민주주의를 알아야 하는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했다. 선포부터 해제까지 단 6시간. 이 사태의 원인을 두고 여야는 서로를 지목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198석의 거대 야당도 모두 국민이 선택한 결과라는 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권력은 국민의 투표로 형성되며, 다수가 선택한 이들이 권력을 행사한다. 다수결의 원칙은 때로 유권자 자신에게 해가 되는 선택일지라도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는다. 나치의 집권도, 소크라테스의 사형도 다수결의 결과였다. 현재 한국 정치의 교착 상태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사례들은 민주주의적 결정이 반드시 현명한 선택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플라톤이 우려했듯, 민주주의는 다수의 어리석음에 지배될 운명인가? 다수의 이기심을 넘어서는 민주주의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지만, 정작 민주주의 자체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한다. 민주적 절차를 거쳤다는 이유만으로 그 결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민주주의 시민이라면 그 체제의 장단점을 면밀히 이해해야 한다. 장점을 극대화하고 단점을 최소화하는 것은 이러한 이해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미국의 민주주의』(1835)는 이러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 유용한 고전이다. 출간된 지 200년 가까이 지났음에도, 이 책은 민주주의의 전개 양상을 놀라울 정도로 정확히 예측한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토크빌은 민주주의의 본질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분석하며, 그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조망한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동력은 이기심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사법제도에 대한 높은 이해와 주권재민(主權在民)의 공동체 의식 덕분이었다. 특히 그는 배심원 제도와 지방분권이 이러한 의식을 형성하는 핵심 기제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토크빌의 통찰을 길잡이 삼아 그 방향을 모색해 보자.
본론 1: 민주주의의 양면적 동력—이기심
먼저 우리를 대표하는 이들, 즉 정치인에 대해 생각해 보자. 물론 훌륭한 정치인도 있지만, 자신보다 역량이 부족해 보이는 정치인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정치에 관심 있는 시민이라면 '저런 사람이 나를 대표한다니'라는 자조 섞인 탄식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토크빌(Tocqueville, 1835/2022)은 민주주의에서 능력과 덕성이 부족한 사람이 당선되기 쉽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반드시 단점만은 아니라고 주장한다(p. 163). 귀족정에서 관료는 귀족 사회 내부의 검증 과정을 거쳐 선발되므로, 개인적 능력과 도덕성 면에서 뛰어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들은 귀족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경향이 있어, 시민 다수의 이익과 괴리된 결정을 내릴 확률이 높다. 귀족 소수의 이익과 시민 다수의 이익은 본질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반면, 민주정의 대표자는 개인의 덕성이나 능력보다 대중을 설득하는 능력, 그리고 특정 집단에 이익을 제공하겠다는 공약에 따라 선출되는 경향이 있다.[1] 다만 민주정에서는 다수의 지지를 얻어야만 권력을 획득할 수 있으므로, 선출된 대표자가 추구하는 이익은 시민 다수의 이익과 대체로 일치하게 된다(Tocqueville, 1835/2022, p. 163). 결과적으로 민주주의는 장기적으로 시민 다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국가를 이끌어간다.
나아가 토크빌은 민주정의 대표자가 무능하거나 부패하더라도 공동체에 영구적인 해를 끼치기는 어렵다고 본다(Tocqueville, 1835/2022, p. 163). 짧은 임기로 인해 한 사람이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히기 전에 교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자정 작용을 내재하고 있으며, 느리더라도 다수를 위한 방향으로 국가를 이끌어간다.
개인의 이기심이 결과적으로 공동선을 향해 수렴한다는 관점은 흥미롭다. 이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을 뿐인데 전체의 이익으로 귀결된다는 이 역설은, 덕성이 부족한 대표자가 선출되더라도 민주주의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기심이라는 동력에는 양면이 있다. 인간의 이기심은 진화 과정에서 먼 미래의 성취보다 즉각적인 보상에 더 강하게 반응하도록 형성되었다. 불확실한 환경에서 생존해야 했던 조상들에게는 불확실한 미래의 보상보다 당장의 이익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2] 이러한 보상 체계는 장기적 자기 계발보다 유튜브 쇼츠 같은 즉각적 만족에 더 강하게 반응하도록 우리를 유도한다.
따라서 이기심에 기반한 민주주의 역시 장기적 비전보다 단기적 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국민과 정치인이 의식적으로 장기적 미래를 지향하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근시안적 선택에 경도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집단이 위기를 감지하면 미래를 위한 선택으로 방향을 전환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는 집단이 명백한 위험 신호에도 불구하고 근시안적 행동을 지속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세계 금융 위기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있지만, 최종학(2009)은 투자은행의 단기 성과 평가 제도를 주요 요인 중 하나로 지적한다. 위험한 파생상품이 단기간에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금융기관들은 장기적 위험관리보다 단기 이익 극대화에 몰두했다. 그 결과 부실 대출이 누적되었고, 결국 시장 전체의 붕괴로 이어졌다. 요컨대, 신용 관리를 담당하는 금융기관조차 장기적 이익을 추구할 인센티브가 부재할 때 단기적 보상에 경도되어 시스템 전체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후 금융계는 양도제한부 주식(Restricted Stock Unit)과 같은 장기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여 보상 체계를 개선하고 있다.[3]
민주주의 정치체제 역시 이러한 근시안적 선택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정치인의 임기는 짧고, 정권이 교체되면 장기적 정책의 성과나 실패는 다음 정권의 몫이 된다. 따라서 현직 정치인이 미래를 위한 불확실한 선택을 감수할 유인이 부족하다.
한국의 국민연금 개혁이 대표적인 사례다. 인구 구조상 국민연금의 고갈은 예견된 미래임에도,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논의는 지지부진한 상태다(임주영, 2023). 연금 개혁은 미래 세대를 위해 필수적이지만, 현재 유권자에게 즉각적인 이익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우선순위에서 밀려난다. 결과적으로 예측 가능한 위기조차 적절히 대비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민주주의에는 국익에 대한 장기적 고려를 제도화하는 장치가 부족하다. 금융 위기 이후 금융계는 장기 성과 연동 보상 체계를 도입함으로써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근시안적 태도를 일정 부분 교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이러한 보상 체계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구조적으로 쉽지 않다.
물론 재선에 성공한 정치인은 비교적 긴 호흡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그러나 재선 자체가 유권자의 선택에 달려 있으므로, 정치인은 장기적 비전보다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약속하는 공약에 집중할 유인을 갖게 된다. 결과적으로 장기적 국익보다 선거에서 유권자의 선택을 받기 위한 단기적 이익이 정책의 우선순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장기적 미래를 지향하도록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가? 토크빌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국민 다수가 눈앞의 이익을 넘어 먼 미래를 바라볼 수 있다면, 민주주의는 더욱 강력해질 수 있다. 그는 국민이 주인의식을 갖고 공동체의 미래를 함께 고민할 때 민주주의가 성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국민이 이러한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는가? 토크빌에 따르면, 시민이 법치주의를 직접 경험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체득할 때 이것이 가능해진다. 그는 특히 배심원 제도를 민주주의 시민 교육의 핵심 기제로 주목했다.
본론 2: 민주주의를 위한 보강책—민주주의에 대한 공동체적 경험
토크빌(Tocqueville, 1835/2022)은 미국의 여러 제도 중 배심원 제도가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시민의식을 함양하는 실질적 교육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배심원 제도란 시민권자 중 무작위로 선발된 일반 시민이 재판에 참여하여 피고인의 유무죄를 판단하는 제도이다. 토크빌이 글을 쓰던 당시 영국에서도 배심원 제도가 존재했지만, 배심원 자격은 귀족에게만 주어졌다. 반면 미국에서는 시민권자라면 누구나 배심원이 될 수 있었다(Tocqueville, 1835/2022, p. 50).
토크빌은 배심원으로 참여한 시민이 이웃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자신 역시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고 보았다. 배심원 경험을 통해 시민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함을 배우고, 사회적 의무와 타인에 대한 관심을 내면화하게 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공동체에 해로운 이기심을 억제하는 데 기여한다(Tocqueville, 1835/2022, p. 53).
시민이 스스로 법치주의를 내면화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다수의 폭정을 방지하는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다수 집단은 민주주의 체제에서 절대적 힘을 보유하고 있기에, 때로 자신들이 만든 법마저 초월하려는 유혹에 빠진다(Tocqueville, 1835/2022, p. 34). 나아가 다수는 자신들의 감정이 상하지 않을 권리까지 요구한다. 진실이라 하더라도 다수의 정서에 반하면 수용되지 않으며, 다수의 기분을 거스른 사람은 사회적으로 배척당하고 침묵을 강요받게 된다(Tocqueville, 1835/2022, p. 36).
이러한 다수의 폭정을 막기 위해서는 다수 스스로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추는 것 외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다. 따라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인식을 일깨워주는 배심원 제도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로 기능한다.
그러나 배심원 제도만으로 공동체에 대한 애정까지 형성하기는 어렵다. 공동체에 대한 애정은 자신이 그 공동체에 기여하고 있으며 존중받고 있다는 효능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효능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규모가 개인이 인식 가능한 수준으로 작아야 한다. 전 인류가 지구 공동체에 속해 있지만 그 결속력은 국가 공동체보다 약하며, 국가 공동체는 지역 공동체보다, 지역 공동체는 가족 공동체보다 결속력이 약하다. 따라서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형성되려면 공동체의 규모가 적절히 작아야 하고, 구성원들이 기여할 가치가 있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토크빌은 지방분권이 바로 이러한 공동체 애정을 형성하는 핵심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토크빌에 따르면, 미국의 지방분권적 권력 구조는 공공의식을 갖춘 능동적 시민을 양성하는 데 기여한다(Tocqueville, 1835/2022, p. 117). 미국에서는 각 주(州)가 상당한 자치권과 권위를 보장받는다. 이로 인해 시민들은 자신이 속한 주를 헌신할 가치가 있는 자유롭고 강력한 공동체로 인식하게 된다.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의 자치권에 대한 자부심은 지역에 대한 애정과 함께 성장하며, 이는 능동적인 정치 참여로 이어진다. 이러한 능동성에는 자기 공동체에 대한 따뜻한 애착이 함께한다. 결국 민주주의가 야기할 수 있는 단기적이고 사적인 이기심이 공동체를 위한 헌신으로 전환되면서, 더 나은 집단적 선택이 가능해진다.
결론: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서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매년 각국의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를 발표한다.[4] 2023년 기준 한국은 167개국 중 22위를 기록하며 '완전한 민주주의(full democracy)' 국가로 분류되었다(The Economist Intelligence Unit, 2024, p. 9). 이는 29위를 기록한 미국보다 높은 순위다.
2024년 계엄 사태로 인해 차기 평가에서 순위가 하락할 가능성이 있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권위주의나 내전에 시달리는 많은 국가들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공고한 기반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계엄 사태는 한국 민주주의가 과연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성찰할 기회를 제공했다. EIU 평가대로라면 한국은 이미 완전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토크빌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민주주의의 동력인 이기심을 미래를 향해 제대로 방향 짓고 있는지 성찰이 필요하다.
토크빌은 배심원 제도와 지방분권이 사적이고 근시안적인 이기심을 완화하는 제도적 장치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한국에 적용해 보면, 정치 참여가 선거에 한정되어 왔다는 점, 그리고 서울 중심의 중앙집권적 구조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물론 미국은 각 주가 독자적인 헌법과 삼권을 보유한 연방제 국가로서 지방분권의 역사가 깊다는 점에서 한국과 상황이 다르다. 한국은 직선제 쟁취와 참여민주주의 확대를 통해 시민이 민주주의를 함께 일궈온 고유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자산을 바탕으로, 개인의 단기적 이익을 넘어 공동체의 장기적 비전을 위한 새로운 정치 참여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국민 다수의 선택이 근시안적으로 흐르기 쉬운 것은, 타인의 권리를 인식하고 공동체 소속감을 체득할 기회가 부족했기 때문일 수 있다. 단순히 대표자를 선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며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국적 맥락에 맞는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수적이다.